양자컴퓨터, 의료 혁신의 게임체인저 되나
양자컴퓨터가 실제 의료 문제 해결에 활용될 수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해 6개 연구팀이 경쟁에 나섰다. 다만 기술적 한계로 인해 성과가 500만 달러 수상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옥스퍼드 외곽에 자리한 영국 국립 양자컴퓨팅 센터(National Quantum Computing Centre) 실험실. 필자는 원자와 빛으로 작동하는 양자컴퓨터 앞에 서 있다. 실험대 위에는 거울과 렌즈가 촘촘히 배치돼 있고, 그 중심에는 루빅스 큐브 크기의 작은 셀이 놓여 있다. 셀 안에서는 100개의 세슘 원자가 정교하게 제어된 레이저 빔에 의해 격자 형태로 떠 있다.
장치는 놀라울 만큼 작다. 손에 들고 실험실을 나와 차 뒷좌석에 실을 수도 있을 정도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하기는 어렵다. 작지만 강력하고 그만큼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이 장비를 개발한 미국 콜로라도에 본사를 둔 양자컴퓨팅 기업 인플렉션(Infleqtion)은 3월 말 미국 캘리포니아 마리나 델 레이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이 기술로 500만 달러(약 75억 원) 상금에 도전한다.
인플렉션은 ‘퀀텀 포 바이오(Q4Bio)’라는 30개월짜리 양자컴퓨팅 경쟁 프로그램의 최종 단계에 오른 여섯 개 팀 가운데 하나다. 비영리 기관 웰컴 리프(Welcome Leap)가 주관하는 이 프로그램은 오류가 잦은 초기 단계의 양자컴퓨터가 실제로 인간 건강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만약 성과를 입증할 수 있다면 양자컴퓨터의 실질적 가치를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다만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고전 컴퓨터와의 결합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자컴퓨터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지만, 기존 컴퓨터와 함께 작동하는 ‘양자-고전 하이브리드’ 전략을 활용하면 기존 방식으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넘어설 수 있다.
이번 대회에는 두 가지 상이 걸려 있다. 하나는 50큐비트 이상의 시스템에서 의미 있는 의료 알고리즘을 실행하는 데 성공한 팀에게 주어지는 200만 달러(약 30억)가 걸린 상이다. 여기서 큐비트는 양자컴퓨터의 기본 연산 단위를 의미한다.
또 하나는 100큐비트 이상을 활용해 실제 의료 분야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양자 알고리즘을 구현한 팀에게 주어지는 500만 달러 규모의 대상이다. 수상팀은 엄격한 성능 기준을 충족해야 하며 기존 컴퓨터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입증해야 한다.
도전의 규모만큼 경쟁도 치열하다. 상당수 팀이 수상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 영국 노팅엄대의 계산화학자 조너선 허스트(Jonathan D. Hirst)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고, 세포의 에너지원인 ATP 분자의 양자적 특성을 연구하는 스탠퍼드대 그랜트 롯스코프(Grant Rotskoff)는 “200만 달러 상 기준에는 확실히 부합한다”고 자신했다.
다만 500만 달러 대상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롯스코프는 “현재 기술로는 사실상 구현이 어려운 과제”라고 평가했다. 기술적 난도가 워낙 높은 만큼 상금이 수여되지 않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대회 결과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대부분의 연구가 공개되지 않았고, 비밀유지계약(NDA)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성과를 둘러싼 주장과 반박이 엇갈리는 양자컴퓨팅 분야의 특성을 감안하면 최종 판단은 결국 심사위원들의 몫이 될 전망이다.
양자와 고전의 결합
양자컴퓨터의 핵심 개념은 원자나 빛의 광자처럼 양자역학 법칙을 따르는 미시적 대상들을 활용해 기존 컴퓨터로는 모델링하기 어려운 복잡한 현실 세계의 과정을 모사하는 데 있다.
연구자들은 수십 년에 걸쳐 이러한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새로운 소재를 개발하고, 신약을 설계하며, 비료 생산과 같은 화학 공정을 개선하는 데까지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돼 왔다. 그러나 원자와 같은 양자 시스템을 다루는 일은 극도로 까다롭다. 특히 산업적으로 의미 있는 수준의 응용을 위해서는 외부 환경의 잡음에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대규모 고성능 장비가 필요하다. 문제는 아직 그런 수준의 양자컴퓨터는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 가능해질지도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웰컴 리프는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대형 양자컴퓨터 시대를 기다리는 동안 현재의 소형 장비로도 의료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를 검증하기 위해 2024년 Q4Bio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선발된 12개 팀에 각각 150만 달러(약 22.5억 원)의 연구 자금을 지원했다.
최종 단계에 오른 6개 팀은 접근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양자컴퓨팅의 한계를 보완하는 전략을 택했다. 오류가 많고 성능이 제한된 현재의 장비 특성을 고려해 계산의 상당 부분은 고전 컴퓨터에 맡기고, 새롭게 개발된 알고리즘으로 이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경우에 따라 기존 기술보다 더 높은 성능을 보이는 알고리즘이 활용되기도 한다. 대신 양자 프로세서는 계산 규모가 커질수록 기존 방식으로는 처리하기 어려운 핵심 연산에만 투입된다.
예를 들어 옥스퍼드대 세르게이 스트렐추크(Sergii Strelchuk)가 이끄는 연구팀은 양자컴퓨터를 활용해 인간과 병원체의 유전적 다양성을 복잡한 그래프 구조로 분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숨겨진 연결 관계와 잠재적인 치료 경로를 찾아내는 것이 목표다. 스트렐추크는 “계산 유전체학의 난제를 풀기 위한 플랫폼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기존 계산 도구는 데이터 규모가 조금만 커져도 성능이 급격히 떨어지는 한계를 드러낸다. 스트렐추크 연구팀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동화된 파이프라인을 구축했다. 특정 문제에서 고전적 해법이 한계에 부딪힐지를 사전에 판단하고, 데이터를 양자 알고리즘에 맞게 재구성해 다시 고전 컴퓨터로 풀 수 있도록 하거나 잡음이 많은 초기 양자컴퓨터에서도 처리할 수 있게 조정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실제 계산에 비용을 투입하기 전에 미리 검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핀란드 헬싱키의 양자 알고리즘 스타트업 알고리드믹(Algorithmiq)은 클리블랜드 클리닉(Cleveland Clinic)과 협력해 IBM의 초전도 양자컴퓨터로 특정 파장의 빛에 반응하는 암 치료제를 시뮬레이션했다. 기예르모 가르시아 페레스(Guillermo García-Pérez) 최고과학책임자는 “이 약물은 체내에 퍼져 있어도 아무 작용을 하지 않다가 특정 파장의 빛이 닿는 순간에만 활성화된다”며 “빛이 조사된 부위에서만 종양을 공격하는 일종의 분자 수준 표적 탄환과 같다”고 설명했다.
이 치료제는 이미 방광암을 대상으로 임상 2상 시험이 진행 중이다. 이번 양자 기반 시뮬레이션은 기존 알고리즘을 개선한 형태로, 향후 다른 질환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사브리나 마니스칼코(Sabrina Maniscalco) 최고경영자(CEO)는 “기존 컴퓨터로는 시뮬레이션이 어려웠기 때문에 활용 범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마니스칼코는 이번 대회에서 수상 가능성에도 자신감을 내비치며 알고리즘 개발 과정에서 확보한 방법론의 확장성에 주목했다. 그는 “Q4Bio 프로그램 기간 동안 우리가 이뤄낸 성과는 의료와 생명과학 분야의 화학 시뮬레이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독보적인 결과”라고 말했다.
인플렉션은 세슘 기반 양자컴퓨터를 활용해 의료 데이터에서 암의 특징 신호를 식별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시카고대와 MIT 연구진과 협력해 ‘암 유전체 지도’와 같은 대규모 데이터세트를 분석하는 양자 알고리즘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전이된 암의 기원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목표다. 프로젝트를 이끄는 티그 토메시(Teague Tomesh)는 “암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를 아는 것은 최적의 치료법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러한 패턴이 기존 컴퓨터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방대한 데이터 속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인플렉션은 양자컴퓨터를 활용해 데이터 간 상관관계를 찾아 계산 규모를 줄이고, 이렇게 축소된 문제를 다시 고전 컴퓨터에 넘겨 처리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토메시는 “양자와 고전 컴퓨터를 각각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결합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한편 노팅엄대 연구팀은 가장 흔한 성인 발병 근이영양증인 근긴장성 근이영양증 치료제 개발에도 양자컴퓨팅을 활용하고 있다. 연구팀의 데이비드 브룩(David Brook)은 1992년 이 질환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규명한 인물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브룩과 허스트를 포함한 연구진은 미국 보스턴의 양자컴퓨터 기업 큐에라(QuEra)와 협력해, 약물이 질환을 유발하는 단백질과 결합해 작용을 차단하는 과정을 양자 계산으로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근이영양증은 근육이 점점 약해지는 유전 질환이다.
신중한 전망
참가팀들이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대회를 총괄하는 시한 사지드(Shihan Sajeed)의 시각은 보다 신중하다. 캐나다 워털루에서 양자컴퓨팅 기업을 운영하는 그는 Q4Bio 프로그램 디렉터로서, 현재와 같은 초기 단계의 장비로는 대상 기준을 충족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잡음이 많은 양자컴퓨터로 기존 컴퓨터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성과 자체에 대해서는 기대 이상이라는 평가를 내놨다. 사지드는 “프로그램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양자컴퓨팅이 생물학에 확실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며 “지금은 양자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어느 정도 드러난 상태”라고 말했다. 특히 참가팀들이 활용한 ‘양자-고전 하이브리드’ 접근법에 대해서는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관건은 이러한 성과가 실제 수상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최종 판단은 심사위원단의 몫이다. 공정성을 위해 심사위원 구성은 철저히 비공개로 유지되고 있으며, 결과는 4월 중순 발표될 예정이다.
사지드는 수상 여부와는 별개로 이번 시도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번 대회의 목표는 현재 존재하는 장비로 의미 있는 알고리즘을 구현하는 데 있었던 만큼,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기술 자체의 가치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는 “결국 필요한 것은 성능이 더 좋은 기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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